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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십자군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필생의 역작『십자군 이야기』제1권이 나왔다. 이 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200여 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십자군 전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십자군 전쟁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 전쟁의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박진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세계와 역사, 그 장대한 물결의 흐름을 바꿨던 십자군 전쟁을 보면서 독자들은 중세와 십자군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과 권력에 대한 통찰력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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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7월 7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1963년 가쿠슈인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 『일리아드』를 읽고 이탈리아에 심취하기 시작했으며, 도쿄대학 시험에 떨어진 후 가쿠슈인대학을 선택한 것도 ‘그곳에 그리스 로마 시대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는 서양철학을 전공했고, 당시 일본 대학가를 열풍처럼 휩쓸었던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알게 된 후 학생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졸업 후 1964년 『일리아드』의 고향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4년 뒤인 1968년,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中央公論」지에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15년에 걸쳐서 로마인 이야기를 1년에 한 권씩 발표하겠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표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서양문명의 모태인 고대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현장을 발로 취재하며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로마사에 천착하고 있는 그는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는 도전적 역사해석과 소설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필력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30년이 넘게 독학으로 로마사를 연구한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로 알려진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으로 1970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30여 권에 이르는 저작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초기작인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비롯해, 『바다의 도시 이야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 20여 권의 중세 르네상스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과 로마 제국 흥망성쇄의 원인과 로마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한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그리고 『남자들에게』 『사일런트 마이너리티』 등 그 특유의 냄새가 묻어 나오는 감성적 에세이류가 그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영웅들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힘을 숭배하는 보수적인 작가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마음을 열고 어떤 일에든지 개방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하면 인생은 굉장히 유익하고 즐거워진다는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부분으로 자리매김할 줄 안다. 그것은 시오노 나나미를 오늘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서도록 한 원동력이 되고 있는 듯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대표작인 『로마인 이야기』는 현대인의 삶의 철학과 좌표를 제시하는 동양인이 쓴 서양사다. 이 작품은 방대한 자료를 취재 · 정리해가면서 엮어간 거대한 로마 통사이면서 현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주는 훌륭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서양인에 의해 씌어진 서양서보다 서양의 역사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시하여 의문조차 갖지 않는 사실들에 대해 집요한 의문을 가지면서 크나큰 역사적 의문을 풀어가는 작가 특유의 방법이 서양문화에 속하지 않은 독자로 하여금 그녀의 저작들을 읽는 데 훨씬 도움을 준다.

그녀의 작품들은 각자의 문화를 상대화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 해준다.『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15세기 피렌체의 정치가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탐구하여 『마키아벨리 어록』과 함께 내놓은 책으로,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인 「군주론」「전략론」「정략론」「피렌체사」에서 그의 언어들을 그대로 발췌하여 수록함으로써 마키아벨리 사상의 진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의 작품으로 세 도시 이야기 시리즈 『은빛 피렌체』, 『주홍빛 베네치아』, 『황금빛 로마』, 르네상스 저작집 시리즈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르네상스의 여인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신의 대리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바다의 도시 이야기(상)(하)』, 그리고 전쟁 이야기를 다룬 『로도스섬 공방』, 『전레판토해전』 등의 작품이 있다.

그밖에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을 서술한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상)(하)』, 『문학의 탄생』, 그리고 『침묵하는 소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의 풍경』, 『살로메 유모 이야기』,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1·2) 등의 에세이가 있다. 현재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를 집필중이다.

그레고리오 7세

1077년 1월 추운 겨울날. 북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 문 앞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은 이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자임하던 중세 독일의 국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내복바람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알현하기 위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을 파문한 교황에게 용서를 빌고 복권을 부탁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사흘이나 황제를 성문 밖에 방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를 알리는 첫 신호 ‘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갈등하는 교황과 황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의 지위도 부정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파문이란 인간으로 존중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사회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하물며 권력을 다투는 황제에게 내린 파문은 그의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파문은 하인리히 4세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왕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귀족들과 갈등하던 하인리히 4세에게 교황의 파문은 뜻하지 않은 위기를 가져왔다.

그의 이런 위기는 그가 스스로 자초했으며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초기 프랑크 왕국부터 유럽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이 있는 왕들과 결탁하였다.


프랑크 왕국 시기 메로빙거왕조의 클로비스 1세.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사를마뉴 대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오토 대제 등이 모두 기독교의 세력 확장과 안정에 힘을 보탠 왕들이었다. 교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만큼 특별한 권리를 돌려주어야만 했다.

왕들은 교회의 교리로 사회 안정과 통치권을 강화하면서 성직자들의 자리까지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교회는 왕에게 권리를 일부 양도하는 대신 그들의 군사력에 힘입어 재산을 지키고 이민족과 이교도로부터 보호받았다.

그러나 2인3각 경기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여 교회와 사회의 안정, 왕권과 성직자의 권위 신장을 도모하였던 왕과 교회는 각자의 몸집이 커질수록 동상이몽을 하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혼란스럽던 유럽지역이 안정을 되찾고 민중들이 교회의 교리 안에 교화되자 가톨릭은 더 이상 왕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다.

왕들의 입장에서는 종교를 떠나 새로운 왕권중심의 시대로 나아가는 데 교회가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서로의 입장 차이 속에서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이 되었고 하인리히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인물 됨됨이는 왕의 권력에 고개 숙이던 이전의 교황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부의 축적에 관심이 없는 외골수 수도자였으며 이를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강요하였다.

이시기는 교회의 안정으로 일부 성직자들이 왕권과 결탁하여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레고리오 7세는 이러한 교회 내의 부패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그는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왕권으로부터 독립하여야만 하며 교회 스스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하인리히 4세와 갈등을 빚었다. 이미 상당수가 세속화되어 있던 교회의 성직자들은 교황의 종복인 동시에 왕의 봉신이기도 하였다. 교회가 이들 성직자이자 봉신자들을 교회 속으로 흡수해 버리면 왕권이 약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게다가 하인리히 4세는 어머니 아그네스의 섭정으로 이미 많은 귀족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상태에서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급선무는 이전의 왕권을 되찾는 것이었고, 나아가 더 큰 제국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말 잘 듣고 협조적이며 적당히 세속적이었던 교황도 거추장스러운 판에 독립적 권력을 가진 교회를 만들려는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먼저 공격한 것은 하인리히 4세였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안에 난색을 보이는 세속화된 성직자들을 부추겨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하였다. 왕의 눈치를 보던 이전의 교황들은 이러한 조치에 맥없이 폐위당해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외골수였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폐위선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서 폐위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것은 하인리히 4세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하인리히 4세의 왕권강화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들은 이때를 노려 얼씨구나 이탈하기 시작했다.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신을 대신하는 교황으로부터 파문 당한 사람은 인간 구실을 하지 못했다.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들도 교황의 강력한 조치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4세에 반기를 든 귀족세력도 나타났고 그를 대신할 왕을 새로 뽑자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을 아우스부르크에 소집하여 향후 하인리히 4세의 운명을 결정하려 하였다.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 4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교황에게 자비를 구걸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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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01 -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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